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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휴전 70주년…한미동맹 더 굳건해져야

한미 정상은 지난 4월26일 발표한 공동합의문과 워싱턴 선언을 통해 양국은 더욱 강화된 상호방위 관계를 발전시키며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연합방위 태세의 유지를 확인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 확장억제가 항구적이며, 북한의 한국에 대한 핵 공격은 즉각적, 압도적, 결정적 대응에 직면하게 될 것을 재확인했다.     올해 7월27일은 한국전쟁 휴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5년 8월 구소련은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기 전 평양에 먼저 들어와 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소련 군정은 10월 평양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김일성을 북조선 공산당 책임 비서로 임명했다. 이후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그리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제전쟁으로 확대됐고 상호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6·25 한국전쟁 초기 한국군은 열세를 보였다. 하지만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됐다. 특히 미 공군은 세계 항공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104만여 회의 출격을 통해 북한군에 막대한 피해를 줬다. 한국 공군도 미군의 전투기 지원으로 1만4000여회 출격하며, 북한 전지역의  기간 시설물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으며 이는 전세 역전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     남북은 막대한 피해를 남긴 채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합의했다. 이후 한국은 미국에 북한의 재침략에 대비한 강력한 군사동맹을 요구하였고 양국은 마침내 1953년 10월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방위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전쟁 억지, 평화와 안정 유지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약 3년간 지속한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은 70년 전 끝났지만 지금도 북한의 남침이 우려되는 불안정한 휴전 상태다. 북한은 그동안 1·21사태, 판문점 도끼만행, 아웅산과 KAL기 테러, 천안한 폭침 ,연평도 공격 등 수 많은 도발을 했으며 지금도 사이버 공격, 핵실험 등으로 위협하고 있다.     한미동맹재단 자료에 의하면 1953년 휴전 후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미군은 350만 명이 넘고, 1950년대에는 서부 전선을 한국군이 아닌 미군이 주로 지켰다고 한다. 한국 근무 중 순직한 미군은 92명이라고 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순직한 미군과 그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드린다.   국제관계는 종종 상식과 합리성이 벗어나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는 힘에 의한 평화의 구현이 요구되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은 경제·군사 강국이 되었지만 주한미군과 함께 늘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야 하는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6·25 한국전쟁 휴전 후 70년간 한미안보동맹은 굳건히 유지됐다. 대한민국은 한미동맹을 한층 강화해 한반도 평화는 물론 동북아 안보의 균형 유지, 자유민주 체제와 자유시장 경제의 가치를 공유하며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선도하는 국가가 되길 소원한다.     심인태 / 대한민국 공군전우회 LA지회장발언대 한미동맹 휴전 한국전쟁 휴전 한국전쟁 초기 한국 공군도

2023-07-13

[기고] 아, 잊으랴! 6월에 만난 슬픔을

누가 6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슬픈 옛날을 더듬으며 우거진 녹음 속에 숨을 죽이면서 피해 다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간다. 해마다 현충일엔 너댓명의 노병들이 죽은 전우의 이름 앞에 둘러앉아 그 치열했던 전장 속으로 빠져든다.  새파랗게 젊은 육군 소위들이 이름 모를 산야에서 적의 포탄 속을 헤매다 피투성이가 되어 고지에서 내려올 때 그래도 살아 있음을 감사했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세월의 증표인 백발마저 거의 다 빠진 나이 90이란 신분증에 이마의 주름살 계급장과 가슴에 단 낡은 훈장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죽은 전우 곁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있음을 미안해하면서 통곡한다. 벌써 73년째, 6·25한국전쟁은 아직도 슬프고 아픈 기억으로 남아 눈시울을 젖게 한다.       나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의 한 중학교(당시 6년제) 재학생이었다. 갑자기 터진 전쟁에 북한 인민군을 피해 남으로 향했다가 가족과 헤어졌다. 어디 나 혼자 뿐이랴. 갈 곳 없는 서울의 중학생들이 떼 지어 군번도 계급도 없이 무작정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전세가 호전됐을 때 국방부장관 명에 의해 나도 학교로 복귀했다. 하지만 어차피 입영할 몸, 졸업 무렵 다시 육군간부후보생 (OCS)에 지원해  6개월 만에 소정의 과정을 거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소모 소위’란 소리를 들으면서 전방부대에 배치돼 치열한 전투에 참전했다. 휴전 직전의 전투 상황은 전쟁 중 가장 많은 전·사상자가 발생했을 정도로 치열했다.     휴전 후 1957년, 미국에서 얻은 엄청난 무상 군사원조 덕에 한국군은 항공기부터 해군함정, 그리고 지상군에 절대적 장비인 전차도 갖추게 되었다. 또 군사 교육 목적으로 초급장교들의 미국 유학도 많았다. 나도 그 중 한명으로 선발돼 영화나 뉴스로만 보고 듣던 미국 땅을 밟아보는 행운을 1년간 누렸다.     뉴저지에서 유학 중이던 6월 어느 주말 오전, 시내 관광에 나서려는데 숙소 앞에 젊은 부인이 어린 자녀 2명을 차에 태운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굳모닝” 하고 인사하며 지나가려는데 그 부인은 “웰컴어보드” 하며 차 문을 열어주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그 차를 타고 말았다. 그 부인은 나를 본인이 다니는 교회로 데려갔다. 처음으로 미국교회에 출석해 예배드렸고 부인 집에 초대되어 점심 대접도 받았다. 그날 관광 계획은 당연히 포기했다.   부인은 쌀밥에 채소를 버무려 김치처럼 만든 샐러드와 푸짐한 프라이드치킨, 커피와 아이스크림까지 준비했다. 그리고 부인의 7세 아들, 5세 딸과 함께 식사했다. 그런데 식사 도중 미군 정복을 입고 육군 상사 계급장을 단 건장한 남성 사진을 발견했다. 부인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사랑하는 남편이고 애들의 아빠”라고 소개했다. 지금 어디서 근무하고 있냐고 되물었더니 그 부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남편은 한국전쟁 휴전 한 달 전에 한국전에서 전사했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순간순간 나는 “오 마이 갓”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온몸이 굳어버리는 듯했다. 그 부인은 이어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지만 분명 남편이 그나라를  도와줬다는게  감사한 일이죠” 하면서 돌아서 눈물을 훔쳤다.     “선하신 하나님, 어쩌면 저렇게 마음씨 착하고 어린 자녀를 둔 행복한 가정에 슬픔을 주십니까?” 나는 신앙심도 없었지만 하나님을 원망했다. 전쟁의 유물은 과부와 고아라는 말이 실감 났다. 그리고 “하나님, 이 잔인한 6월에 저토록 큰 슬픔일랑 거두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슬픔 한국전쟁 휴전 육군 소위들 주름살 계급장

2023-05-31

'우드스톡 페스티벌' 한국서 열린다…한국전 휴전 70주년 기념

미국의 전설적인 록 페스티벌이자 음악 축제의 시초라고 불리는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올여름 한국에서 개최된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정식 판권 계약을 맺고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건 이번 한국이 처음이다.   공연기획사 ‘SGC엔터테인먼트’는 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전쟁 휴전 70주년을 맞아 올해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을 표어로 페스티벌 ‘우드스톡 뮤직 앤 아트페어 2023’을 연다”고 밝혔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1969년 뉴욕주 베델에서 처음 열렸다.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등 당대의 스타들이 참가해 1960년대 록 문화의 정점을 보여줬다고 평가받는다.   그해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열린 페스티벌에는 4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참가해 자유와 반전주의, 다양성의 추구를 외쳤다. 이후 1994년과 1999년과 2009년에 각각 개최 25주년과 30주년, 40주년을 기념해 후속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1960년대는 비틀스, 밥 딜런, 어리사 프랭클린이 활동한 대중음악의 전성기”라며 “아티스트 외에 그 당시를 상징하는 지적재산(IP)을 뽑으라면 우드스톡이 아닐까 싶다”고 페스티벌의 의의를 설명했다. 이어 “우드스톡은 페스티벌을 넘어 공연의 상징”이라며 “한국에서 우드스톡이 열리는 건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는 2010년 이 페스티벌을 열기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페스티벌 이름 사용에 대한 판권과 출연자 섭외 등의 문제로 개최가 무산됐다.   김 은수 SGC엔터테인먼트 대표는 “공연 무산의 아픔을 겪고 우드스톡이 13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을 기뻐해 주셔도 될 거 같다”며 “스포츠는 올림픽, 축구는 월드컵, 페스티벌은 우드스톡”이라고 소개했다.   SGC엔터테인먼트는 30여개 팀과 공연 출연 계약을 진행하고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페스티벌 라인업을 공개하진 않았다. 김지혜 기자미국 우드스톡 우드스톡 페스티벌 한국전쟁 휴전 한국전 휴전

2023-01-06

[독자 마당] 백두산호

7월27일은 3년1개월 간의 6·25 한국전쟁 휴전 일이다. 하지만 결코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휴전 상태다.   1950년 6월25일 소련제 탱크 등으로 무장한 북한군이 옹진반도, 춘천, 홍천 등을 통해 동시다발로 38선을 넘어 침범하던 그 날 밤 부산 앞바다에도 괴선박 한 척이 나타났다. 그 배엔 600명의 무장 괴한들이 타고 있었다. 해군은 바로 전날 입항한 백두산호를 급파했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백두산호는 아무 표시도 없는 선박을 향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다. 당시 백두산호에는 전투 경험이 없는 60명의 승조원이 타고 있었고 전투 장비도 변변치 않았다. 포탄을 낭비할 수 없어 육안으로 파악할 수 있을 때까지 가까이 가 포를 쏘았다. 그중 한 발이 명중했고 배는 침몰했다. 그 배는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내려온 북한 배였다. 그들이 작전대로 부산을 점령했더라면, 6·25 전쟁의 양상은 또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백두산호를 지휘한 분은 손원일 해군 제독이었다. 그 배 한 척을 마련하기 위해 해군 장교들은 봉급의 10%를 저축했고, 사병들은 병 모으기, 부인들은 바자를 통해 돈을 모았다. 손 제독의 부인도 삯바느질로 돈을 보탰다. 그렇게 마련한 돈이 1만5000달러, 여기에 정부예산 4만여 달러를 더해 백두산호를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대포와 포탄을 사고 헌배를 수리하기 위해 장병들은 배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고생했다. 그 배가 진해에 입항한 날이 1950년 6월24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해냈다. 괴선을 침몰시겼다.     몇 일 전 한국 신문에 국산 초음속 전투깅 KF-21의 첫 비행 사진이 실렸다. 대한민국의 국력은 초음속 전투기를 개발한 세계에서 8번째 국가가 되었다.   7월27일은 휴전이 선포된 날이다. 국력이 약한 나라의 아픔을 잊지 말자. 노영자·풋힐랜치독자 마당 백두산호 당시 백두산호 한국전쟁 휴전 초음속 전투기

2022-07-26

[기고] 휴전 69주년, 노병 빨간 마후라의 회상

1950년 6월25일 북한의 전면기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국군의 필사 항전과 유엔군의 참전으로 한반도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를 지켜냈다.     열악한 장비의 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보았으나, 유엔군의 참전은 우리 민족에게는 실로 엄청난 행운이었다.     오늘은 한국전쟁 휴전 69주년을 맞는 날이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을 앞두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얻기 위해 적군의 야간침공으로 빼앗긴 땅을 주간에는 아군 공군의 엄호하에 지상군이 재탈환하는 등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배선 전우(공사 1기)는 한국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으며 휴전 당일에도 무스탕 전투기로 3회나 출격을 했다. 그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월남 후 1949년 공사 1기로 공군에 입대했다. 1992년 미국으로 이민와  LA에서 생활하다 최근 다시 한국으로 역이주를 했다.      다음은 이배선 전우가 개인 출격일지를 정리한 ‘빨간 마후라의 회상’이라는 책자와 2기 미주전우회 모임에서 증언한 내용을 정리한 것.   ‘휴전일 전까지 무스탕(P-51) 전투기로 89회 출격을 했고 휴전 당일에도 3회나 출격을 했다. 4개월 전 같은 편대기로 강원 고성 북쪽 지역에서임무 중 산화한 동료 전우(임택순)의 모습을 떠올리며.     전사한 임택순 전우는 책임감과 희생정신이 강하며 평소 온순한 성격에 유머가 넘쳤다.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먼저 간 전우의 몫까지 적에게 갚아줄 것을 다짐했다. 휴전일 이른 아침 90번째 출격을 하며 고성 북부 351고지 지상군 엄호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와 주스 한 잔을 마셨다. 그런데 다시 연락이 왔다. 땀이 마를 겨를도 없이  91회 출격을 했다. 지난번 전우가 적의 대공사격으로 산화한 장소 부근이다. 점심 후 우리에게는 또 한 번의 출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기지에 있는 모든 탄약을 소비하라고 외치며 92회째 마지막 출격을 시작하였다. 전쟁 중 희생된 선후배 그리고 동료들의 영혼에 대한 보답을 위해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상 포대와 병력집결소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기지로 귀환하며 나의 마지막 출격은 이렇게 끝났다. 항공기 엔진을 끈 후 정비사가 비행기로 뛰어 올라오며 성공적인 임무완수와 무사 귀환을 축하해 주었다.     출격과 귀환 시 이번 비행이 나에게 마지막 비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최선을 다짐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하나님의 가호와 은총을 기원했다. 돌아보면 매번 출격 시 나와 함께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대한민국은 지금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종전국가가 아닌 휴전국가로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시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희생을 토대로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루었다.   오늘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서  한미 안보동맹을 확대 발전시키며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가치를 함께하며 조국의 항구적 평화와 번영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   미국은 2009년부터 한국전쟁 휴전일인 7월27일을  ‘한국전 참전용사 휴전일’로 지정하고 조기를 게양하고 있다.   6·25전쟁 참전 전우, 선배님들께 머리 숙여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심인태 / 공군전우회 LA지회장기고 마후라 휴전 한국전쟁 휴전 출격과 귀환 휴전 당일

2022-07-26

[기고] 끝나지 않은 전쟁

7월 27일은 6·25한국전쟁의 휴전 69주년 기념일이다. 전쟁의 총소리가 멈춘 날을 일컬어 ‘휴전일’이라 하기도 하고 미국은 이날을 ‘정전일’이라 부른다. ‘휴전’은 국제법상 여전히 전쟁 상태를 의미하지만, 당사국 간의 협상을 통해 전투를 잠시 멈춘 상태를 말한다. 정전은 전투 행위를 완전히 멈추는 것이며 교전 당사국들이 정치적 합의를 이룰 수 없어 전투 행위만 정지하는 것을 뜻한다.       세계전사상 엄청난 희생을 가져온 큰 전쟁이었음에도 2차 대전과 월남전 사이에 낀 한국전쟁은 미국에서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잊혀져 가는 전쟁’이 되고 있다. 6·25한국전쟁은 김일성이 기획하고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마오쩌둥이 지원한 반민족적 불법 침략 전쟁으로 역사는 말한다.     아무튼 한반도의 현실은 언제든지 군사적 도발로 인해 전쟁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지금까지도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 군사적 위협이 상존하는 나라, 북한이 끊임없이 핵 도발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이제 그 치열했던 한국전쟁 휴전 69주년이 됐지만,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고 휴전상태로 지금도 200만 명의 남북한 정규군이 초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채 군사분계선에서 대치하고 있다.     세계전사상 유례없이 처참했던 3년1개월의 전쟁, 마땅히 그 참상을 기억하고 전쟁 없는 한반도를 다짐해야 했으나 참상의 기억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북한은 온통 핵과 미사일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미국이 올해도 7월 27일을 한국전쟁 참전용사 정전기념일로 선포하는 대통령 포고문을 발표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오랜 희생의 역사를 공유한 동맹국인 미국과 한국이 평화와 안정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휴전 후에도 적화통일을 목표로 1968년 청와대 습격, 울진·삼척지역 무장공비침투, 1999년과 2002년 1차, 2차 연평해전, 2010년 천안함 폭침사건 등과 같이 수많은 도발을 해왔다. 그동안 ‘잊혀진 전쟁’이 이제 ‘끝나지 않은 전쟁’이란 사실에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국방태세와 국민의 안보의식이 강화되었을 때는 평화를 누리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국방태세 미비와 국론이 분열되었을 때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의 강점. 6·25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을 맞았다. 오늘날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것도 건국 1~2세대들의 굳건한 안보의식과 애국심, 튼튼한 한미동맹과 국방력이 뒷받침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한반도 정전체제는 날이 갈수록 녹슨 분단의 철책처럼 노후화해 군사적 대결이 격화되고 전쟁발발 위기가 고조되는 휴전상태로 되었다. 대통령도 말한 것처럼 평화는 굴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힘으로 지키는 것이다. 정말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고대 로마의 슬로건이 우리의 교훈이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의 참상을 다시 한번 목격하면서 국가의 존망은 국력에 좌우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아직도 많은 청소년과 국민들 가운데 6·25전쟁이 언제, 왜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적지 않게 전쟁 불감증에 걸려있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국군 및 유엔 참전용사들께서 흘린 피와 땀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이든 대통령도 “숭고한 희생을 치른 장병들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국가는 참전 노병들의 헌신을 기억해 주는 게 보훈이요 보상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전쟁 한국전쟁 참전용사 한국전쟁 휴전 전쟁발발 위기

202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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